아이들은 죽음 이별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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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7 18:00:00
PRIMARY AND SECONDARY OBJECTS
애도를 구성하는 아이들의 반응을 우리가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면, 그들은 청소년의 실험적인 애도가 성사될 때까지는 아이들은 중요한 대상을 애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Wolfenstein 와 Nagera와 다른 사람들의 이의에 타협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중요한 단어를 강조하고, 욕구 만족 대상의 개념에 기대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아이는 엄마나 아빠 또는 다른 대리적인 caretaker로서 그런 결정적인 중요한 대상을 애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의 도움없이는. (R. Furman, 1964a).
그러나 펫은 몹시 사랑하지만 엄마나 아빠 만큼 아이의 발달에 결정적인 대상이 아니고, 비교적 중요성이 축소되기 때문에 바로 애도될 수 있다. 그 펫은 3번째 대상, 다시 말해서, 청소년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랑하고 애도하기 전에 child는 펫을 사랑하고 애도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펫은 사전적으로 말해, 원인 불명이다. 그러나 petting 은 전희 처럼, 예비단계의 실험적인 성관계의 한 종류이다. 우리는 3번째 대상으로서 펫을 보는 것이 부정확하지 않다는 것, 말하지면, 아이가 어떤 굉장한 존재에 관한 레슨을 배울 수 있는 transitional toy, 즉 반은 인간, 반은 물건이라는 것이다.
만약 중간 대상이 첫 번째 not-me 소유이고(Winnicott, 1953), (1971) 아이의 신체 경계와 엄마로부터 분리를 규정하도록 돕고 엄마가 부재할 때에 그녀와 연결하는 중요한 자기 위안을 제공한다면 우리는 아이의 not-me 의 살아있는 소유로서 펫을 개념화할 수 있다.
Abrams and Neubauer (1975)는 출생 시작에서, 아이들이 “thing"이 아니라 ”person"에 높이 개별화된 접근을 한다. 어떤 아이들은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다른 아이들은 움직이는 것과 다른 무생물 대상에게 더 매료된다. 사람과 물건에 대한 애착의 수준은 발달에 의해 수정된다. 그러나 아이의 대상관계의 성격상의 특징은 지속된다. 사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펫은 대상 관계와 현실 테스팅의 지배력안에서 아이에게 중요한 기능을 제공한다.
분석에서 아버지에 대한 살인적인 외디팔 증오로 스트러글하고 있는 6살 소년은 학교에서 기니피그가 죽었을 때 아주 슬퍼했다. “기니에게 미안해요”라고 그가 말했다. “나는 미안하지 않아요 한 것은 개미입니다. 당신은 죄책감없이 사람을 죽알 수 있어요.” 그는 기니피그를 대신에 가져온 금속 차(장난감)에 그의 관심을 돌렸다. 대상을 찾으려는 그의 스트러글에 공감할 수 있는데 사람, 동물, 금속장난감 그의 외디팔 소망을 멈추게 하고 그의 죄책감을 극복하게 하는 개미는 죄책감없이 죽일 수 있지만, 사랑하는 기니피그는 안되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아버지도 안된다. 대상들의 availability (아버지, 친구, 기니피그, 개미, 금속차, 장난감) 와 그것들과의 관계가 그의 소망과 사랑을 스트러글하는 것처럼 그의 솔루션의 다양함에 영향을 줄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the first human "possession"이고, 그 일차적인 대상은 그를 케어한다.
그는 어른의 세계에서 권리 없는 시민이다. 많은 요인들이 그의 성장과 발달을 결정할 것이다. 그 자신의 권리안에서 소유물에서부터 인간으로 - 다시 말해 충분한 시민권. 아이 자신의 소유(생물 과 무생물)는 그에게 이차적인 세계를 제공하고 그는 거기에서 주인이다. 예를 들어, 아이의 관점에서 항상 펫의 적극적인 오너로, 부모의 소유에 의존된 아이와는 반대로 그 펫은 사랑받고, 미움받고, 상실되고, 애도될 수 있다. 그의 부모의 소유로서 아이와 아이의 소유로서 펫의 개념은 다층적인 결정의 지나치게 단순화로, 아이들은 부모와 펫의 관계가 복잡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펫의 이차적인 세계안에서 충동과 사랑의 조정과 지배력이 일차적인 세계에서 부모와 또래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이의 적응과 발달을 돕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우리는 일차적인 대상에 대한 아이의 의존이 아주 강력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실이 아이를 압도하는 두려운 정서를 작동한다는 그러나 유사하게 비록 약화된 정서가 펫, 장난감, 그리고 상상의 이차적인 세계안에서 지배되고 연구될 수 있다. 펫은 엄마를 애도하는 것보다 더 쉽게 애도될 수 있다. 이차적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관찰하기가 쉽다. 왜냐면 그들은 덜 압도적이고 덜 방어적이기 때문이다. 이차적인 세계는 아이의 자아에 놀이터를 제공한다. Greenacre's (1957)는 “세계와의 사랑”, Mahler's (1968)는 개별화의 하부단계인 “연습기”, 또는 Winnicott's (1971)은 “잠재적 공간” 아기와 엄마 사이에 “문화적 경험 또는 창조적인 놀이” 가 발생할 수 있다. 이차적 세계의 영역은 분리 개별화와 “transitional” 경험의 이슈를 엄격하게 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6살 소년은 기니피그와 개미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외디팔 갈등으로 스트러글하고 있었다. W. H. Auden (1968)은 객관적인 현실의 일차적인 세계를 설명했다. ( 우리는 그것에서 태어나 우리의 동의없이 그것으로부터 죽음에 의해 사라진다.) 그리고 시인은 그의 상상력밖에서 만들어진 이차적인 세계이다. 우리는 펫이 그런 이차적인 세계의 중요한 dramatis personae의 하나라고 제안하고 있다. 그 아이는 심리학적인 성장과 발달을 돕는 처리장치에 살고 있는 극장을 가진 것이다.
문헌들은 거의 primary objects의 상실에 대한 어린이들의 반응에만 초점을 두어왔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린이들의 애도에 대한 잘못된 정의와 설명을 갖게 했는데, Nagera는 발달에 대한 위협 때문에 애도가 불가능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고, Erna Furman은 어른이 도울 때에만 어린이가 애도를 할 수 있다고 했다. primary objects가 아닌 다른 대상의 상실에 대한 어린이의 반응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애도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고 설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어린이는 기니피그의 상실에 대한 그의 반응을 깨닫고 설명하는 것이 엄마의 상실에 대한 그의 반응을 깨닫고 설명하는 것보다는 더 쉬울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